"집 짓느라 수고하고 고생한 자들아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푸른 숲길, 임도로 안내하리라~"
오전 열시 바리케이드가 쳐진 임도입구에 도착하자
예의 씩씩한 보폭을 옮기시던 내 지도교수님이
잠시 발걸음을 멈추며 씨익 웃으시더니
우리 부부를 향해 우렁찬 안내멘트를 했다.
신입생환영회였었나 MT 장소였었나
우리 눈에 젊고도 절도있는 걸음걸이로 유명한
지도교수님의 노래를 들을 일이 생겼는데
훗날 독일에 살면서 한번씩 이 웅장한 합창곡이 울려퍼지면
팔십년대초반 내 풋풋한 신입생시절이,
젊고 파워풀한 Y교수님이 자동으로 떠오르곤 했다.
베토벤 교향곡 9번이었다
Freude, schöner Götterfunken,
Tochter aus Elysium
......
아 얼마나 절도있고 힘찬 목소리이셨는지
쉴러의 환희의 송가도 베토벤의 교향곡도 처음 접했을때였다
임도 산책을 가기로 한 날 아침은 몹시 분주했다.
우리집식구들은 라면만 한그릇 끓여 먹어도
부엌을 난장판으로 만들어버리는 신기한 재주가 있는 사람들인데
(당연히 안주인을 필두로)
전날 손님들이 여럿 왔다갔으니
부엌 상황은 끔찍하기 그지 없었고
거실한구석에는 다려야할 옷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기까지했다.
요즘 유일하게 다리미를 꺼낼수 있는 선선한 시간인
새벽이나 아침을 번번히 놓친탓에
결국 이 날 다리미판을 꺼내야만 했다.
한시간을 다려도 다림질은 끝나지 않지
약속시간은 다가오지
불안스레 시계를 쳐다보며 뜨거운 김을 연신 쏘이고 있는데
뒤에서 구시렁구시렁 잔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손님맞이 급조집청소하는데 하나도 보탬이 안되던
영감이 옷타령을 하고 있는것이었다.
"이런거는 금새 땀에 달라붙는데 어떻게 입으라는건지 블라블라"
꺼내 놓은 옷이 영 못마땅해
열심히 다림질을 하고 있는 내 뒷꼭지에다
투덜투덜 잔소리를 늘어놓고 있는것이다
며칠전 Y교수님부부와 산에 가기로 했다는 약속을 전하자
입고 갈 등산옷이 없다는 이야기를
가볍게 흘려들은게 화근이었다.
그렇다고 마누라는 아웃도어패션으로 중무장했냐,
동네 뒷산 올라가는데 청바진들 어떠냐고 했다가
매사에 준비성이라곤 있느니 없느니
평상시 다부지지 못한 내 성격까지 끌고 나오는 바람에
아침기분을 망쳐놓고 말았다
몇벌 있던 등산용바지는
작업복으로 용도변경되는 바람에
페인트가 묻어 있기도 하고
나중에 확인한건데 구멍도 여러군데 나 있기도 했다.
알록달록한 아웃도어인지 국민유니폼인가하는 그 등산용바지가
(나는 이거 진짜 맘에 안들더라만)
그래도 명색이 마누라의 지도교수님과 첫 대면인데
후즐근한 모양새가 좀 거시기해서 화가 나나 싶어
나도 급 성질을 죽이고 바지 멀쩡한게 괜찮구만 하고
살살 분위기를 맞춰주었다.
내 보기엔 여전히 뭐 씹은듯한 표정을 한 남편이
Y교수님과 초면 인사를 나누는데
교수님왈 "인상이 좋으십니다"
나도 모르게 큭 웃음이 나와버렸다
졸업한지 삼십여년이 지나 연락이 된 Y교수님은 놀랍게도
우리집과 아주 가까운 곳에 사신다는 문자를 보내셨다.
심지어 우리가 사는 골짜기는
자주 가시는 등산로 초입이어서
우리보다 이곳 지리에 더 환하시다는 사실도
삼십년만의 전화통화에
여전하신 절도와 에너지가 느껴질 정도였는데
통화후 다음날
간결하고도 군더더기없는 문자를 보내오셨다.
" 얼굴 한번 보자 "
이날의 목적지는 숫고개 임도
새벽에 내린 비로 길은 군데 군데 작은 물웅덩이와 함께 젖어 있었고
나무들은 빗물들을 머금고 있었다.
모르는 사람들과 선뜻 말을 섞지 못하는 남편이
조금 걱정이 되어 쳐다보니
다행히 Y교수님이 리드를 잘 하시는듯
대화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임도는 나같은 초보등산객이 걷기에 더할나위없이
평탄한 길이었다.
완만한 오르막이었다가
거의 느끼지 못할정도의 내리막이 이어지고
이 일대에 많다는 층층나무들이 층층이 서 있었다.
뒤에 쳐져 카메라를 꺼내 사진을 찍는데
그만 들켜버렸다.
아마도 Y교수님은 내가 야생화를 찍으려는 줄 아시고
노란 꽃을 가리킨다.
(그래서 어쩔수 없이 한 컷 찍고 ㅋ)
"용문산이 마터호른과 닮았어..."
아뿔사 독일에 있을때 마터호른에나 갔다 와볼걸
그랬으면 잘난척하며 대화를 주고 받을수 있을텐데 ㅋ
Y교수님은 알고보니 등산매니아셨다.
수많은 명산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이 날 마음속에 올해 목표가 하나 생겨났다.
집에서 20킬로 떨어진 마터호른 등정!
Y교수님은 임도산책전 여러 등산로들을 차를 타고가던 도중
몇번이나 정차해서 가르켜주시곤 했다.
이 좋은 등산로가 바로 집근처에 있는것도 드문일이니
먼데 갈것 없이 매일 매일 두어시간이라도 꼭 걸으라는
권유는 거의 강권에 가까웠다.
집 다 짓고나서 꼴까닥한 여러 지인들 이야기도
생생히 전해주시면서
길이 없어 돌아온 뒷산골짜기
선생님말씀은 당장 실행에 옮기고야 마는
나는 착한 학생 ㅋ
다음날 뒷산에 올랐다.
문제는 없는 길을 찾아 헤매다 결국 오분만에 하산하고
(에구 청출어람하려다 )
그리고 달려간곳은
아웃도어 아울렛매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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