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두 닦는 철학자
그 버스 정류장에는 몇 년째 ‘구두 대학 병원’이라는 간판이 붙은
구두 수선집이 있었습니다.
좁은 공간 안에서 언제나 꼽추 아저씨가 열심히 구두를 고치고 있었습니다.
이제 막 서른을 넘긴 종식이가 처음 이 구두 병원에 들른 것은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시작하던 무렵이었습니다.
그날 저녁 종식이는 한쪽만 닳아버린 구두 밑창을 갈기 위해 구두 병원에 들어섰습니다.
먼저 온 아가씨가 구두를 고치고 있었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선 종식이가 아저씨에게 말했습니다.
“아저씨, 이 구두 밑창 좀 갈아주세요.”
“네, 그러죠. 좀 앉으세요.”
자리에 앉자마자 종식이가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습니다.
“시간이 얼마나 걸리죠? 수선비는 얼만가요?”
아저씨가 대답했습니다.
“시간은 37분쯤 걸리고 요금은 7천 원입니다.
지금이 7시 13분이니까 정확히 7시 50분에 끝나겠네요.“
종식이는 좀 놀랐습니다.
30분도 아니고, 40분도 아닌 37분이라니…….
“37분이라구요?”
“왜요. 못 믿으시겠어요?”
“아니요. 그런 게 아니라…….”
“제가 구두 고친 게 벌써 20년이 넘었어요. 척하면 삼천리죠.”
“알았어요.”
종식이는 먼저 온 아가씨 옆에 앉아 아저씨가 일하는 모습을 지켜보았습니다.
계속 지켜보니 신기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우선 아저씨는 구두 고치는 모든 기계를 불편한 자기 몸에 맞춰 개조해서
쓰고 있었습니다. 구두 뒤축을 가는 회전한 쇠받침대는 오른쪽 페달을 밟으면
몸 앞으로 나오게 되어 있었습니다.
머리 위에도 끈이 여러 개 달려 있어서 어떤 끈을 잡아당기면 사포가 내려오고,
어떤 끈을 잡아당기면 접착제가 담긴 통이 내려오며,
어떤 끈을 잡아당기면 펜치가 내려오게 되어 있었습니다.
종식이가 말을 건넸습니다.
“아저씨, 어떻게 이런 걸 만들 생각을 다 하셨어요?”
“일을 하다보니까 하나씩 아이디어가 생겼지요.
그리고 내 몸에 맞게 연장들을 고치는 게 재미있더라고요.
이것도 발명이죠. 남들이 알아주지는 않지만,
뭐 어디 알아줘야만 맛인가요? 내가 즐겁고 편하면 되는 거지.”
종식이는 순간 멈칫했습니다.
공부를 많이 한 것 같지도 않은데 아저씨가 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에는
뭔가 철학적인 의미가 담겨 있는 듯 했습니다. 아저씨가 계속 말을 했습니다.
“내가 편하고 즐거워야 손님들도 즐거워하시죠. 그리고 난 내 일에 만족합니다.”
종식이는 자신의 모습을 떠올렸습니다.
명문 대학을 나온 것도 아니고 변변한 자격증 하나 없었기 때문에 취직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졸업반 때 열심히 입사원서를 냈지만 번번이 서류심사에서 떨어졌습니다.
종식이는 이때부터 세상에 대한 불만을 늘 가슴에 품고 살았습니다.
어쨌든 대학 졸업 후 어렵게 들어간 첫 직장은 조그만 여행사였습니다.
월급도 별로 많지 않았고 언제나 귀찮은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습니다.
매일 매일 수없이 쏟아지는 짜증나는 문의전화, 끝도 없는 서류처리,
출발 하루 전 여행을 취소하는 사람들, 남의 여권 수백 장을 들고 대사관 앞에
줄을 서야 할 때 느껴지는 자괴감, 서로에 대한 배려가 없는 동료들…….
이런 것들을 떠올리니 종식이는 한숨이 절로 나왔습니다.
구두닦이 아저씨에겐 또 다른 신기한 점들이 많았습니다.
아저씨는 일을 하면서 계속 클래식 음악을 틀어놓고 흥얼거렸습니다.
가끔씩 눈을 지그시 감기도 했고, 머리를 지휘자처럼 흔들기도 했습니다.
‘구두 닦는 아저씨와 모차르트’를 떠올리니 도무지 안 어울리는 모습이었습니다.
“클래식 좋아하세요?”
“왜 내가 클래식 들으니까 이상해요?”
당황한 종식이가 얼버무렸습니다. “저도 좋아하거든요.”
아저씨의 풍자적인 대답이 걸작이었습니다.
“클래식은 가사가 없어서 좋아요. 가사가 있는 노래를 들으면 자꾸 옛 사연도
떠오르고, 노래 가사가 다 내 얘기 같고,
그런데 클래식은 가사가 없으니까 곡만 음미할 수 있잖아요.”
종식이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건 그러네요.”
그러고 보니 아저씨의 왼편에는 시집 한 권이 펼쳐진 채 놓여 있었습니다.
“시도 읽으시네요.”
종식이가 눈이 동그래서 자꾸 물어보자 아저씨는 마치 동생에게
이야기하듯 말을 슬슬 낮추기 시작했습니다.
“시도 좋아하지. 소설은 한 가지를 이야기하기 위해 너무 많은 말을 해.
결국 한 가지 메시지를 위해 사람도 죽이고 헤어지게도 만들고…….
하지만 시는 단 한마디로 많은 걸 전해주잖아.”
이쯤 되자 종식이는 자기도 모르게 스승 한 명과 이야기를 하는 듯 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물어보고 싶은 게 많았습니다.
“돈은 많이 버세요?”
“왜, 자네도 이거 하려고 그러나? 이것도 기업이야. 구두 잘 닦고 친절하게 손님을 대하면
돈 버는 거고, 구두 못 닦고 불친절하면 돈 못 버는 거지.”
누구나 아는 얘기지만 뭔가 가슴에 와 닿는 게 있었습니다.
사실 종식이는 한 번도 여행사 일을 자기 일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습니다.
친절하게 전화를 받지도 않았고, 한 번 더 전화하고 한 번 더 뛰면 더 좋은 결과를
얻을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낮에는 대충 일하고 오히려 밤늦게
소주잔을 기울이며 회사나 상사를 욕하는 데 더 열심이었습니다.
오전 9시인 출근 시간에 맞춰 출근하는 게 한 달에 두세 번 밖에 안됐고,
출장비 내역은 늘 부풀려서 올렸습니다. 생각을 멈춘 종식이가 다시 말을 꺼냈습니다.
“그러면 아저씨는 행복하세요?”
“행복이라……. 글쎄 늘 행복하면 재미없지 않나?
살다보면 행복이나 불행은 교대로 찾아오는 거잖아.”
“그걸 누가 모르나요?”
“알기만 하면 안 되고 그걸 깨달아야지. 그러면 행복이 왔다고 해서,
또는 불행이 날 찾아왔다고 해서 크게 흔들릴 일이 없어. 답은 뻔한 거 아냐?
잠깐 불행하다고 영원히 불행할 거라고 비관하지 않고,
잠깐 행복하다고 영원히 행복할 거라고 착각하지 않고 살면 되는 거지.
비관하거나 착각하면 나만 괴로운 거지. 안 그래?”
“그럼 아저씨는 세상이 공평하다고 생각하세요?”
“공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공평하고,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불공평한거지.”
“그런 말이 어디 있어요?”
“생각해보게. 내가 이미 세상이 불공평하다고 생각하는데 공평할 수 있겠어?”
끊임없는 대화를 나누면서도 아저씨의 손은 한순간도 쉬지 않았습니다.
먼지를 털고, 낡은 뒤축을 뜯어내고, 사포질을 한 다음 새로 붙일 밑창에
접착제를 바르고 불에 달구는 모든 과정이 아저씨의 구두약 묻은 손에 의해
차근차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자네는 직장 다니고 있나?” 아저씨가 물었습니다.
“네, 작은 여행사에 다니고 있어요.”
“재미있나?”
“재미있긴요. 죽지 못해 다니는 거죠.”
“그럼, 죽기 아니면 다니기네.”
“그렇게 되나요?”
“죽는 것과 바꿀 정도로 선택했으면 열심히 다녀야지.
있는 그 자리에서 열심히 해야 더 큰 물로 가는 거야.
열심히 안사는 것도 버릇되는 거라네.”
“버릇이라니요?”
“지금 있는 곳에서 열심히 일하지 않는 사람들은 늘 그렇게 말하지.
지금은 열심히 살지 않지만 좋은 직장을 구하거나 자기 사업을 시작하면
열심히 할 거라고 그런데 그게 잘 안돼. 한 곳에서도 열심히 살지 않은 사람은
다른 곳에서도 열심히 살지 못해. 버릇이 들었기 때문이야.”
“아저씨가 그걸 어떻게 알아요?”
“이보게, 내가 이 자리에서 구두를 닦은 지 20년이 넘었어
이 버스정류장에서 출퇴근하는 사람들은 적어도 1년에 한 번씩은 여기에 오는데
그 사람들을 보면 변화가 느껴지거든.
일이 잘 풀리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분명히 구별되지.“
“하여튼 전 직장을 옮기고 싶어요.”
“내일 옮기더라도 오늘까진 그런 생각 하면 안 되네.”
“생각도 하면 안 되나요?”
“일부러 할 필요는 없지.”
“왜요?”
“다른 사람들이 자네 생각을 모를 것 같지?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뭔가 달라지면 금방 눈치를 채거든.
아마 자네 직장 상사들은 자네를 보면서 그럴 거야. ‘저놈 곧 그만둘 놈’이라고.
그런데 자네한테 중요한 일을 시키겠나?”
종식이는 뭔가 깨달은 듯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아저씨가 계속 말을 이었습니다.
“자네가 지금 직장에서 일하면서 만난 사람들 말이야.
동료든 상사든 거래처 직원이든 고객이든 언젠가는 다 자네의 증인이 되는 사람들이야.”
“무슨 증인이요?”
“세상은 좁네. 우연이라도 자네에 대한 얘기가 나오면
그 사람들은 자네에 대해 점수를 매길 거야. 두렵지 않나?”
“좀 걱정은 되네요.”
“그러니까 내일부터는 마음 고쳐먹어.”
“잘 안돼요.”
“일단 아침에 소풍가는 것처럼 기분 좋게 일어나서 나가고,
어차피 할 일 웃으면서 일해.
머릿속에 자꾸만 쥐꼬리만 한 월급 액수가 떠오르면 지워버리고,
월급쟁이 월급 다 거기서 거기야. 조금 더 받는다고 팔자 고치는 것도 아니야.
기껏 차이가 나봐야 소형차와 중형차의 차이겠지.”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그리고 그 인상 좀 펴고 다니게. 젊은 사람이.
자. 다 됐어. 이거 받아.“
아저씨가 어느새 수선한 구두를 내밀었습니다.
순간 종식이는 시계를 올려다봤습니다.
시계는 정확히 7시50분을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한 달이 행복한 책 / 유린 지음)
친구가 잘나 보이는 날엔
‘친구들이 모두 나보다 훌륭하게 보이는 날/
이날은 꽃을 사들고 집으로 돌아와 아내하고 노닌다’.
100여 년 전에 활동했던 일본 시인 이시카와 다쿠보쿠(石川啄木·1886~1912)
의 짧은 시입니다. 26세에 요절했으나 심금을 울리는 시편을 많이 남겨 일본
에선 우리의 김소월만큼이나 사랑받는 시인입니다. 번역본에 따라 표현에 조
금씩 차이가 있지만, 작가 최인호의 에세이집 『산중문답』에서 옮겨놓은 시
를 인용했습니다. 최인호가 “젊은 시인이 어찌 그런 마음을 눈치챌 수 있었을
까”하며 감탄한 시입니다.
어느 자리든 성공하고, 출세한 친구나 지인들의 얘기가 넘쳐납니다.
연말에 대기업이나 관공서 인사가 집중되다 보니 “누구는 뭐가 됐다더라”는
얘기들이 끝없이 이어집니다. 돈을 많이 벌거나 자식농사에 성공한 친구
얘기도 술기운을 타고 무슨 전설이나 신화처럼 번져갑니다.
그런 친구들이 많을수록 모임은 왁자지껄입니다. 박수로, 소폭(소주와 맥주
를 섞은 폭탄주)으로 축하를 거듭하다 밤이 이슥해지곤 합니다.
그런 밤의 그늘에 적지 않은 친구들의 모습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제비꽃은 결코 진달래를 부러워하지 않고, 진달래는 결코 장미를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 제비꽃은 제비꽃답게, 진달래는 진달래꽃답게 피면 됩니다.
세상에 아름답지 않은 꽃은 없듯, 세상에 쓸모 없는 인생은 없습니다’.
정호승 시인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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